무에 그리도 잘났다고, 세상이 나 없으면 멈추기라도 할 듯이 바쁘게 세월과 싸우다 보니,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국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온다니 한국의 친구들은 반가움에 한바탕 난리법석이다. 변변치 않은 나를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다니,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H 부부와 J 부부는 아예 모든 일정을 접고 우리 부부를 데리고 한 주말 동안 영월, 제천, 단양으로 여행을 떠나 주었다. 나는 한국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들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난생처음 마주한 단양 팔경의 수려한 산세는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느라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영월 근처 소백산 자락의 한 깨끗한 펜션에서 묵었는데, 이렇게 멋진 숙소가 곳곳에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두 친구 부부와 함께한 펜션의 밤은 오랜만에 쌓는 아주 소중한 추억이었다.
새벽 미명, 계곡을 따라 길을 나섰다. 숲 속은 분주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울창한 삼림 사이를 타고 내린 소백산 물길이 태고적 음성으로 조잘거렸다. 서툰 길손의 시름을 조용히 씻어주는듯, 자연은 한없이 깊고 평온했다.
이 여행에서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점심을 먹기 위해 소백산 자락의 깊은 계곡 속 한 음식점에 들렀던 일이었다. 정갈한 한식도 좋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아름답게 단장된 조경 속 작은 연못이었다. 그곳에 수련이 피어 있었다. 아주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한동안 말조차 잊었다.
연꽃과의 첫 만남은 타고르의 시를 통해서였다. 몸도 마음도 가난했던 70년대의 어느 날, 청계천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키탄잘리. 그 안에서 ‘연꽃’을 읽으며 느꼈던 전율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 버렸고, 결국 그 책을 사서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곱씹어가며 읽었다.
종교와 문화를 초월해, ‘연꽃’은 진리를 갈구하는 한 영혼이 깨달음에 이르는 신비로운 순간을 담아냈다. 그리고 그 찰나를 짧은 시 한 편으로 형상화하는 타고르의 언어에 나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시와 연꽃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바라볼수록 새로운 기별을 전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 연꽃의 한 종류인 수련을 소백산 자락의 작은 연못에서 보게 되었다. 조경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연못의 물은 오염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탁하고 흐린 흙탕물이었다. 그곳에서 홍련 몇 송이가 나를 반겼다. 탁한 물 위에서 고고하게 피어 있는 꽃, 타고르도 저 모습을 보았던 것인지…
나는 저절로 한 편의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 수련(睡蓮) >
말갛게 세수한
곱디고운 홍련
왈츠를 추는 요정이려니
이런 눈 호강이 또 있으려나
아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시여하신
하늘의 은총이겠거니
그대가 뿌리 내린 토양은
누군가가 한숨 뱉은 곳
태생적 모순을 딛고 섰건만
청초한 그대 자태에
난 그저 입을 다물 뿐
현실을 비관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절망과 냉소라는 쉬운 선택도 마다하고
어쩌면 그렇게도 해맑은 미소를
그대 꽃망울 버는 날
달도, 별도 숨을 죽이고
바람도 머물러
나그네와 함께
수련으로 피어나고
*. 그런데 수련(睡蓮)은 ’물 위의 연꽃’(水蓮)이 아니라, ‘잠자는 연꽃’이라는 뜻이란다. 오후가 되면 꽃잎을 꼭 다문 채 잠들 듯 쉬기 때문이라고…
수련(睡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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