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근처의 한 도서관에 들렸다가 우연히 한글 수필집 한 권을 발견하고 몹시 기뻤다. 이 외진 곳의 많지 않은한국 사람들을 위한 이 나라 사람들의 배려도 고마웠고, 책 이름이 친근해서 더욱 정감이 갔다. 글 좋아하는 이들에게 낯설지않을 유안진, 이향아, 신달자 세 분이 함께 출간한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라는 책이었다. 몇 사람이 벌써 빌려 읽은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곳 저곳에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을까! 맑은 문장과 아름다운 영혼이 돋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예쁜 글을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오랜만에 좋은 책 하나를 만났다. 그리운 옛 친구를 본 듯 반가웠고,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빌려다 놓고는 한 번에 다 읽어버리지 못했다. 며칠 아껴서 곱씹으며 천천히 읽었다. 이 기분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산다는 것이 뭔지, 대단한 것도 없으면서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쁘기만 하다. '바쁘다'기보다는 '여유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 가을이 유독 서글프게 다가온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다른 일을 할 시간은 있으면서도, 좋은 책 한 권 읽을 여유가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 근사한 계절에, 좋은 책 한 권은, 내 영혼을 위한 귀한 양식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풍요로운 감성과 아름다운 정서, 자아 인식과 충만함 같은 고매한 것들이 깃들기 어려운가보다.
무엇을 위해, 어느 시점을 위해 그렇게 희생하며 아름다운 삶을 접어놓고 사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그토록 애쓰다가 내 삶을 이토록 메마르게 했던가? 아니, 이제 찌들어 아주 곤죽이 되어버린 이 자아를 누구 것이라 해야 할까? 아니다, 다시일으켜 세워야 한다. 나를 부축하라. 싸늘하게 식어버린 자아를 이끌고 서둘러 에덴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리고 거기서 생명의시여자를 다시 만나야 겠다. 이것은 만사를 제쳐 두고서 우선 해야 할 일이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그렇다, 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연연히 이어지는 삶이라 하던데, 그리 멀지 않은 훗날 내 자녀들의 얼굴에서 나의 분신을 또 읽을 터... 싫어서 싫어서외면하여 오던 실상이 막상 투영되면 그건 허상이라 우겨야 하는가. 빈 껍데기 같은 삶을 이제 그만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표주박 한가득 옹달샘 물을 길어 올리련다. 거기에 땀을 씻으면 생기가 소생하리. 예전에 나무하러 산을 오르내릴 때, 옹달샘 곁에 지게를 받쳐 놓고, 표주박 한가득 물을 마시며 다녔다. 그러면 똑같은 무거운 등짐을 지고서도 집까지 갈 기운이 넉넉했었다.
이 가을엔 한 권의 맑은 시집을 읽고 싶다. 내 영혼을 거기 담그고, 나도 맑은 심성, 깨끗한 영혼이 되고 싶다. 아니, 수필집도 좋다. 꾸밈없이 풀어낸 누군가의 진솔하고 성숙한 삶을 들여다보고, 함께 맞장구를 치며 깊은 감동에 젖어보고 싶다. 아마 내가 가을을 타나보다.
고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다. 비록 현대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에 심취한 자들일지라도 고전의 숭고한 맛에 고개를 숙인다. 나는 특히 다윗의 시편들을 좋아한다. 모두가 흠모하는 당대 최고의 임금이었음에도, 그에게서 그렇게 맑고 진솔한 노래들이, 정직한 인생의 고백들과 깨우침들이 흘러나왔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의 시성은,영혼은 살아서, 시대를 넘어 지금도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눈을 지긋이 감고 그의 노래들을 경청하기 좋아한다.
때론 인생이 버겁고 벅찰 때가 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택의 밤을 홀로 직면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정로의 계단’을 들고 밤을 씨름한다. 인생이 온통 희뿌연 안개에 덮여 있을 때 ‘시대의 소망’을 펼치기도 한다. 나는 그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찾는다.
경전 열왕기하 6-7장에는, 선지자 엘리사 시대에 아람 왕 벤하닷이 유대 사마리아땅을 침공하여 오랫동안 포위함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식량이 핍절하여 굶주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내, ‘이제 네 아이를 삶아 먹자’(왕하6:29)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읽는 이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든다. 허나 정작 성 바깥의 상황은, 헷 족속과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용병들이 사마리아를 구출하기 위해 급히 달려오고 있다는 소문에, 아람 군대는 이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친 후였다. 이제 성곽 안에서 필요없이 굶주리고 험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무리들에게, 사마리아 성 밖으로 나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밖으로 나가면 거기 풍요가 있다. 평화가 있다.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세상이 잠든 시간에 고즈넉이 불을 밝히련다. 굳이 촛불일 필요는 없다. 창문을 마주하고 앉으면 더욱 제격이다. 그러면 나는 또 한 번 딴 세상을 보게 되리.
불을 밝힌 영혼의 창가에는 언제나 천사들이 모여 선다는 말을 기억한다.
내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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